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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新報】帰国した고삼혜さんのいま

我ら東京朝高28期が高3の時に、祖国の映画俳優になりたいと帰国した고삼혜さんの記事が、朝鮮新報に掲載されてました。原文のまま紹介します。

《인민이 기억하고 사랑하는 배우》- 고삼혜씨는 그런 값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고삼혜씨

30여년간 영화예술부문에서 일해온 고삼혜씨는 1960년 5월 일본 도꾜에서 출생하였다.

조선학교에서 조선말과 글, 력사와 지리를 배우며 성장한 그는 애국적인 가정의 영향을 받으며 18살되던 해인 1978년에 180차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그에게는 봄무지개와 같이 아름다운 꿈이 있었다. 조국에 가서 영화배우가 되는것이였다. 그 꿈을 간직하게 된 동기가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가 방영된적이 있었는데 재일동포들은 물론이고 일본인민들속에서도 반향이 컸다.

조국의 영화에 심취되기 시작한 그는 동무들과 함께 조선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 《사과딸 때》를 몇번이나 관람하였다.

사상예술성이 높은 영화들을 보고나서부터 고삼혜씨는 조국에 가서 영화배우가 되고싶다는 의향을 부모들에게 거듭 아뢰였다.

사랑과 믿음, 기대가 어린 아버지, 어머니의 고무속에 그의 귀국은 인츰 실현되였다. 뒤이어 그는 자기의 소원대로 평양연극영화대학 배우학부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고삼혜씨의 봄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것은 태여나서부터 18년동안 일본에서 살았던 까닭에 그의 조선어발음상태로는 영화화술을 원만히 할수 없었던것이였다.

열심히 발음훈련과 화술공부를 하였지만 그는 대중앞에 나서서 연기를 할 때마다 자신감이 없이 늘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를 내군 하였다.

학부의 강좌장, 실습지도교원은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고삼혜가 주저앉을세라 힘과 고무를 주었고 그의 화술지도에 품을 넣었다.

어떤 날에는 아침에 깨여나서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강의받을 때만 제외하고 줄곧 한문장만 곱씹어 반복하여 말한적도 있었다.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그의 배우연기와 화술형상수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본인자신도 놀라우리만치 비약적으로 올라서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가 흘러 고삼혜씨는 졸업을 한달 앞두게 되였다.

조선4.25예술영화촬영소에서 배우선발을 나왔던 배우단단장은 20여명의 졸업생들가운데서 유독 고삼혜씨만을 선출하였다.

대학안의 수많은 교직원들과 학생들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들은 어떻게 그토록 키도 작고 체소하면서도 소박하고 단정하여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아 배우적인 인물과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던 고삼혜씨가 배우선발 첫 순위에 당당히 오를수 있었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도 평양연극영화대학의 학생들속에서 일화로 전해지고있으며 후배들에게 노력끝에 못해낼 일이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주고있다.

그는 어느한 단편영화에 단역배우로 출연하여 만사람에게 첫선을 보이였다.

30여년간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였다.

이어 예술영화 《네거리초병》, 《고향으로 돌아온 련대장》, 《려단장의 옛 상관》에 출연한 그는 특색있는 화술과 인물형상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였다. 예술영화 《아버지의 마음》에서 애기엄마인 부기원역을 맡게 된 그는 조금도 마다하지 않고 한살된 첫아들을 안고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그는 배우생활의 나날 영화예술인의 가장 높은 명예와 평가는 인민이 기억하고 인민의 사랑을 받는것임을 새겨안으며 성실하게 역형상창조에 림하여왔다.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어제, 오늘 그리고 래일》과 예술영화 《법동농민》을 비롯한 여러 영화, TV련속극들에서 특색있는 연기술을 보여주었으며 예술영화 《내가 본 나라》, 《곡절많은 운명》, TV련속극 《계월향》, 《방탄벽》등에서는 류창한 외국말대사형상도 맡아하였다.

온 나라가 고난의 행군을 하고있던 어려운 시기에 그는 갓 조직된 국립희극단 배우로 조동되였다.

조용하면서도 사색적인 성격인 그는 희극적인 역형상을 찾아내기 위해 항상 성격탐구를 깊이있게 하여 촌극 《전화번호가 바뀐탓에》에서 사람들에게 기쁨과 랑만을 더해주었다.

남편 리원복씨와 함께

영화와 함께 흘러온 그의 인생길에는 인민의 사랑을 받는 인기배우인 남편 리원복씨가 언제나 함께 있었다.

조선예술영화 《명령―027호》에 출연하였던 처녀시절의 고삼혜씨는 조선인민군 정찰병역을 수행한 리원복씨와 영화제작사업에 마음을 합쳐가면서 청춘의 사랑을 무르익히였다.

오늘 고삼혜씨는 조선4.25예술영화촬영소 배우단 단장인 남편의 예술창조사업을 적극 뒤받침해주며 영화예술인의 긍지속에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있다.

朝鮮新報朝鮮語版の原文をそのまま引用

6 COMMENTS

まさかね~💦

幼馴染だけど、貫禄ありますね👀
旦那さんは、リスボク英雄💕
確か、チョンドガと一緒に帰国したと思う😊😊
東天紅には来るのか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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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売る乙女

小、中、高一緒。
高3の修学旅行。
合歓の郷でのクラス対抗の出し物で見事優勝した作品「花売る乙女」。
演出、脚本、主演すべてこなしたのが彼女でした。
僭越ながら私は地主の手先役。笑いを取ったと自負しております🤗
彼女は立派に自分の人生を生きている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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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気ですか

色々考えさせられます。
立派になったサメを祝福したい気持ちもありますが、自由の無い生活に苦労を重ねているんじゃないかと。ホントなら東天紅で久しぶりーと近況を話し合っただろうに。涙しか出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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テツandトモ

1960年5月生まれなら学年はひとつ下のはずです。誕生日を旧暦から新暦に変えたのかな? 理由は分からないけれど、고삼혜さんのように飛び級した人が他にもいました。なんでだ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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